우리말글 위기와 자본주의

 

우리말글 위기와 자본주의


얼마 전에 나는 내 글에서 한글날을 맞아 우리가 살려야 하는 것은 한글과 함께 우리말이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적이 있다. 가령 대통령이 ‘잡세어링’이라고 말한 것을‘job sharing’이라고 표기하지 않고 ‘잡세어링’이라고 쓴다면 우리글로 적어 한글을 지켰다고 할 수 있겠지만, ‘나눠 같이 일하기’라는 우리말은 지키지 못한 것이 된다. ‘비즈니스 프렌들리(business friendly)’도 마찬가지다. 한글 지키기는 우리 말 지키기에 견줘 그렇게 어렵지 않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말을 살리는 것은 우리글을 살리는 것 보다 더 어렵고 중요하다.


우리가 우리글말을 죽이는 일은 이미 일상 깊숙이, 넓게 벌어지고 있다. 직업일람표라고 하면 될 것을 ‘job map’이라 하는가 하면, 진주 실내체육관은 ‘Jinju Arena’라고 해야 속이 시원해지는 모양이다. 상품이름, 회사이름, 가게이름은 그 첨병이다. 옷, 자동차, 아파트, 음식 등의 거의 모든 이름이 외국어로 되어 있어 굳이 례를 들 필요조차 없고, 지역의 무림제지는 ‘무림페이퍼’로 이름을 바꾸었다. OO C&G같은 회사는 뭐하는 곳인지 이름만으론 잘 모르겠다. 공공기관도 덩달아 나서고 있다. 경남도는 ‘feel Gyengnam’이라 하여 기관자체를 상품화 하고 있고, 어떤 지자체에서는 금연운동 이름을 ‘스모크프리’로 붙여 펼치고 있다. 조금이라도 배운 사람은 한 문장에 한 단어 정도는 외국말을 쓴다. 휴대폰, 자동차 키, 통장 남바, 체크 같은 말은 시골의 배우지 못한 어르신들도 곧잘 쓴다. 개점 개업은 이제 ‘오픈’에 저만치 밀려나 있고, 축구단은 거의가 ‘에프씨’로 바뀌었다. ‘투마로우 위드 유’, ‘부라보 유얼 라이프’, ‘유 퍼스트’ 같이 영문을 통으로 쓰기도 한다.


우리가 우리말글을 죽이는 것에는 여러 가지 리유를 찾아 볼 수 있다. 무심함(습관), 주체의식 모자람, 과시욕 등이 그것인데 아무래도 가장 큰 리유는 알림(광고)인 것 같다. 이는 우리가 묶여 있는 체제가 자본주의라는 사실과도 깊은 관계에 있다. 자본주의 아래서는 그럴듯한 겉모습이 내실보다 중요하며, 많이 알려 하나라도 더 많이 팔아먹는 것이 생존방식이다. 심지어 자신의 몸도 비싼 상품으로 만들어 돈 버는 수단으로 바꾸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영어는 돈을 버는 가장 강력한 치장이 된다. 그럴듯하고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조금만 주의 들여 보면 자본주의가 우리말글을 죽이는 가장 큰 적임을 알 수 있다. 그것도 미국식 자본주의가 되다보니 영어가 가장 큰 경쟁 상대가 된다. 자본주의에 의식과 생활을 지배당한 지금, 문자와 언어가 온전하길 바랄 수 없다. 돈의 힘에 따라 문자와 언어도 바뀐다. 이것이 우리 현실이다. 알고 일부러 우리말글을 버리는 것도 문제지만, 부지불식간에 우리 자신이 우리말글을 죽이는 적극가담자가 되고 있는 것은 더 큰 문제다. 서강대학교 영어학습 사업본부(에스엘피라고 하더라)에서는 ‘영어를 가르치겠습니까? 언어를 가르치겠습니까?’라고 물으며 생각부터 영어로 하는 교육을 시키겠다는 야심찬 다짐을 담은 광고를 내 보내고 있다. 대통령은 영어로 나라를 세우겠다고 하고, 학생들은 영어로 립신출세하겠다고 해대니 우리글 우리말이 직면한 내부공격은 갈수록 무서워지고 있다.


표기를 한글로 하느냐 마느냐도 중요하지만 그 말 자체를 우리말로 할 것이냐 아니냐는 더 더욱 중요하다. 형편에 따라 우리말글과 다른말글을 같이 표기하고 같이 쓸 때도 있을 테지만, 뭘 더 우선해야 할지는 기본적으로 생각이 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말글을 죽이는 커다란 배경이 자본주의 체제란 것을 기억해야 한다. 돈이 사람 숨까지 앗아가는 이 무시무시한 체제에서 우리말글이 그 자본주의 위력 앞에서 스스로 살아남기를 바랄 수 없다. 자본주의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우리말글도 하나 둘 씩 사라진다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우리의 돈에 대한 무한욕구가 우리말글을 죽이는 커다란 원인이라는 점에 주목해 보자. 자본주의에 말글이 침식당하는 것을 대세나 흐름으로 받아들여 무감각하게 살아가다보면, 우리말글도 온데간데없이 휩쓸려가고 없을 것이다.


2009. 11. 6. 

by 롱산 | 2009/11/06 16:44 | 잡문 | 트랙백 | 덧글(0)

헌법재판소에 분통 터뜨리기 전에 생각해야 할 것

 

헌법재판소에 분통 터뜨리기 전에 생각해야 할 것


법 없이 살 수 있는 사람, 법 없이 돌아가는 조직 단체라면 그 보다 좋은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계에서는 오히려 법이 없으면 불안해한다. 몇 사람만 모여도 규칙을 만들어 안전한 령역을 구축하려 한다. 사람들은 규모가 커지고 욕심이 많아질수록 욕심을 보장하고 통제할 수 있는 단체를 필요로 하게 되고, 그 단체를 운영하는 법을 만들게 되었다. 국가와 헌법은 그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단체고 법이다.


그 최고의 법이 설 수 없다면 그 나라는 최상의 나라가 될 수 없고 그 나라는 그 나라를 움직이는 비공식/공식 주류세력의 사유물이 되고 만다. 그래서 이 나라 같은 경우 헌법재판소라는 것을 두어 나라를 공기公器로 지키려고 애쓴다.


헌법재판소는 헌법을 절대적 잣대로 두고 하위법이 이를 어기는지 아닌지를 판단한다. 그런데 최근 헌법재판소에서 내리는 판결을 보면 헌법을 바꾸던지, 헌법재판소를 없애던지, 헌법재판소를 재판하는 기구가 또 있어야 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한다.


특히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미디어법이다. 부정투표인지 아닌지를 그래서 무효인지 유효인지를 판결해 달라는 요청에 헌재는 절차상 위법하나 더 이상 제재할 수는 없다는 모호한 판결을 내렸다. 그래서 어찌하라는 것인지 모르겠다.


립법부가 권력과 보조를 맞추고 사법부가 권력의 뒷받침을 해주는 식으로 이 나라에서 삼권분립은 거의 유명무실하다. 이런 상황에서 헌법재판소가 법리적 판단에 앞서 권력을 의식하지 않기란 싶지 않다. 헌재가 이런 비난을 이겨나가는 방법은 두 쪽을 다 인정해주어 중간을 잡는 것이다. 특히 기득권이 야당이 되어 헌법소원을 할 때는 온갖 궁리를 다 해야 한다.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이 로무현 전 대통령의 행정도시 이전을 소원했을 때 서울을 6백년 된 수도라는 주장을 인정해주려고 기상천외하게도 관습헌법이라는 전문용어를 들이대어 사람들 입을 쩍 벌어지게 만든 것은 좋은 보기다.


기득권과 현정권이 하는 일엔 ‘아니오’라고 말하지 못하기에 헌재의 판결은 초동급부도 예측하기 어렵지 않다. 례를 들어 만약 4대강 사업 위헌을 소원하면 어떨까. ‘환경평가 주민동의 등 일부 위헌 요소가 있으나 사업 자체는 정당하다’ 아마 대충 이렇게 나올 것이다. 파병도 같은 맥락에서 판결하지 않을까. 사정이 이러하니 뜻있는 사람들은 헌법재판소가 왜 있어야하는지 회의하게 된다. 물론 이를 비난하는 사람은 판결이 제 주장대로 되지 않은 것에 대한 불만 표시라고 리해하는 선을 넘어서지 못하겠지만 말이다. 


내가 보기엔 굳이 헌법재판소는 없어도 될 것 같다. 더 중요한 것은 국회다. 립법부인 국회가 바르면 대화 토론 설득 타협으로 합리를 찾게 될 것이니 구태여 헌법소원까지 가는 일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 국회가 스스로 인민을 대신하여 법을 만드는 독립 위상을 포기해 버리면 치우친 법이 나올 수밖에 없다. 여당의원이 기득권을 유지하고, 대통령 권력을 보좌해야 한다는 일념에만 불타오르면 더더욱 그렇게 된다.


지금 정권 들어서고부터 헌법재판소를 비롯한 사법부의 판단은 사회성과 공공성을 부정하는 것이 많았고, 가진 자들 쪽으로 기울어진 것이 많았다. 뜻있는 사람들이 민주주의의 위기를 의식하여 시국선언을 한 것조차 불법으로 몰아세웠지 않은가. 립법부인 국회 또한 민생을 외면하고, 기득권의 리익을 보장해주는 법 만들기에 죽을 힘을 쏟아 붓고 있다. 


사법부는 법을 지킬 생각이 없고, 립법부는 법을 공명정대하게 만들 생각이 없다.  사법부이기를 립법부이기를 스스로 포기하고 있다. 헌재를 포함한 사법부와 립법부 국회를 심판할 주체는 인민이다. 나의 권리를 대리해주기는커녕 도리어 나를 짓밟는 법을 만들고 집행하고 있는 사람에게 나의 권한을 위임하는 것은 자해행위다. 권한을 위임해 준 인민의 여론을 반영하지 않고, 기득권과 대통령 권력 보장을 제 할 일로 삼는 자들을 심판하는 길은 투표에 있다. 대통령을 제대로 뽑고 국회의원을 올바르게 뽑으면 대통령과 립법부와 사법부의 분립과 견제를 안정시킬 수 있다. 헌법재판소를 살리는 길도 그 안에 있다. 


2009. 11. 5.

by 롱산 | 2009/11/05 16:08 | 잡문 | 트랙백 | 덧글(0)

마음일까? 몸일까?

 

마음일까? 몸일까?


아내는 허리가 안 좋다. 퇴근 뒤 아내를 태워 한의원에 가서 치료를 받고 온다. 그날도 여느 날처럼 치료를 받고 차를 타고 집으로 오려는데 차창 밖으로 사람 길에 어디서 낯익은 사람이 걸어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제법 멀리서 뒷모습만 봤는데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OO서당 훈장 성재誠齋 허 선생님이셨다. 제법 오랜만에 뵈었지만 차 안이라 달리 인사를 드릴 수는 없었다.


옆에 앉은 아내가 갑자기 소리쳤다. “그래 여보오! 당신도 저렇게 걸어, 얼마나 시원시원하고 당당하고 활기 차, 저렇게 허리를 펴면 키도 2센티미터는 더 크게 보일거야?” 허 선생님의 걸음걸이를 보고 평소 구부정하게 시선을 발아래에 두고 걷는 내 자세를 고치라고 주문하는 말이다. 허 선생님은 모르긴 몰라도 환갑은 지나신 년세인데, 걷는 자세는 그야말로 보무당당에 직립보행에 두 팔을 크게 휘두르는 것이 초등학교 학생이 체육시간에 걷는 것 같이 하신다. 아마도 향교에 강의를 나가시는 길인 것 같은데 굳이 아내가 거들지 않아도 ‘와! 나도 저렇게 걷고 싶다’는 마음이 일었다. 


평소 나 스스로도 내 걸음걸이와 상체 자세를 고쳐보려고 노력은 하는 편이다. 그러나 거울 앞에 서서 습관적으로 허리를 펴고 가슴을 내밀고 머리를 세우고 고개를 당겨 보긴 해도 그 뒤부터는 나도 모르게 자세가 풀어지곤 한다. 뒷날 허 선생님 처럼 씩씩하게 걸어보니 왠지 내 걸음이 아닌 듯 어색해지고 금방 보통 때 내 자세로 돌아와 버렸다.


허 선생님은 도대체 어떻게 저렇게 걸을 수 있는 것일까. 안에 있으면 밖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다는 말이 있다. 허 선생님은 언제나 겸손하고, 당당하다. 그러면서 허허롭다. 선생님의 마음 씀이 그대로 걷는 자세로 나타난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반면 나는 별 뾰족한 수 없으면서도 매사 고민형이다. 세상은 언제나 걸러 돌아가고, 나와는 잘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속으로 온갖 생각을 뒤섞어 하고, 내 의지와 달리 돌아가는 현실을 답답하게 여긴다. 이런 멍하고 관조적이며 사유적인 내 마음 상태가 걷는 자세에 그대로 드러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마음 씀을 바꾸면 걷는 자세도 당당하게 바꿔질까? 마음을 바꿔 먹고 걸어본다. 하지만 잠시 그 때 뿐 마음도 이전 나로 돌아가고, 걸음걸이도 도로 제자리다. 혹시 반대로 겉이 속을 만드는 것은 아닐까? 걸음을 바꾸면 생각방식이 바뀌게 되는 것은 아닐까? 생각은 집어치우고 걷는 동작만 신경 쓰고 걸어보니 그것도 오래 못 간다. 마음 변화도 크게 와 닿지 않는다.


과연 몸과 마음 가운데 영향을 주는 것은 어느 쪽일까. 몸도 마음도 당당하고 자신 있게 바꾸고 싶은데, 해묵은 몸과 마음은 바꾸기가 쉽지 않다. 맑고 밝게 살고 싶은데, 어느 것을 중심으로 다른 것을 바꾸려는 시도는 걸핏하면 실패한다.


절대자유의 경지에 몸과 마음을 놀리는 저 장자莊子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까? 모든 구속과 불만에서 훨훨 날아오르고 술술 흘러가고 싶다. 마음이 그리할 수 있도록 몸을 놀리고, 몸이 그리 놀 수 있도록 마음을 써야할 것 같다. 하루  아침에 바뀌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 마음과 몸 어느 한쪽이 주主가 되고 부副가 되는 것은 아닐 것 같다. 서로 모두 건강하도록 서로 힘을 얻도록 쳐지고 지친 쪽을 북돋워야 할 것 같다.


2009. 11. 3.

by 롱산 | 2009/11/05 09:08 | 잡문 | 트랙백 | 덧글(0)

신종플루로 휴업하면 국가이미지가 떨어진다?

 

신종플루로 휴업하면 국가이미지가 떨어진다?


신종플루가 사실상 대류행 단계에 들었다고 한다. 사망자 수가 40명을 넘어 섰다. 신종플루는 학생들이 집단생활을 하는 학교에서 집단적으로 발생한다. 의사들도 2주 간 휴업을 권하고 있다. 그런데 정작 정부와 교육당국은 신종플루 때문에 휴업하는 나라라는 오명(?)을 안게 되어 국가이미지를 떨어뜨린다, 휴업을 해도 아이들이 가만히 집에만 있지 않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휴업의 의미가 없다는 리유를 들어 의사의 권고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참으로 해괴한 론리다. 사실 후자는 개연성이 높다. 짐승처럼 우리에 가둬 놓고 있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일일이 아이가 누구와 어디에 가는지 따라다니며 감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그러나 국가이미지 이러쿵저러쿵하는 것을 들어보면 참으로 웃음도 나오지 않는다. 인민의 건강하지 못해 하나 둘 죽어 가버리면 국가는 누가 구성하는가. 인민 한 사람 한 사람의 건강이 수출로 돈 벌어 들이는 것만도 못하단 말인가.


툭하면 감초처럼 튀어나오는 국가이미지란 도대체 무엇인가. 최근 대통령이 지G20이라는 알듯말듯한 회의를 유치하고 국어사전에도 없는 국격을 높였다고 떠드는 것은 국가이미지 규정이 어떻게 조작되는지를 잘 보여준다. 국가이미지를 내세우는 사람들은 대체로 경제론리를 뒷받침하는 하위요소로서 국가이미지의 의미를 규정한다. 또 그들은 우리 스스로가 생각하고 만들어가는 주체적 의미로서 국가이미지를 상정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으로 겁주고 가두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하며, 다른 나라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미리 내게 불리하게 생각하고 겁먹은 나머지 소극적이며 방어적으로 내가 만든 이미지에 지나지 않는다.


삼성의 불법을 건드려도 국가이미지가 떨어진다고 말하고, 재벌 수사를 해도 국가이미지가 더럽혀진다고 말한다. 촛불시위도 룡산참사도 그들에겐 국가이미지 망신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정당한 로조운동에도 국가이미지를 훼손한다며 방망이를 휘두르더니 이제는 질병관리하여 인명을 지키려는 것도 국가이미지를 들이대며 주저하는 꼴을 보이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명분도 실익도 없는 파병은 국익이라면서 강행한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이미지를 말하는 것인가. 그리고 국익이란 어떤 것인지 눈에 보이게 손에 잡히게 해 줄 수는 없나?


잘 사는 나라들은 잘 사는 만큼 깨끗하다. 투명하고 공정하고 공평한 것을 좋은 이미지로 여긴다. 세상은 그렇게 바뀌어가고 있다. 그럼에도 유에스에이가 이끄는 깡패적 국제무역금융군사질서를 글로벌 스탠더드라 하며 불투명 불공정 불공평을 국가이미지로 가린다. 어리석기 그지없는 짓이다. 진정 국가이미지를 높이고 국익을 늘리는 것은 지금 우리가 가는 길과 정반대다. 삼성을 비롯한 재벌을 투명하게 만드는 길이 국가이미지를 또렷하게 하고, 국익에 리롭다. 로동자의 권익을 지켜주는 것이, 민주주의와 평화를 외치는 시위를 보장하고 사회적 약자의 살길을 도모해 주는 것이 국가이미지와 국익에 절대적으로 리롭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라크에 이어 아프간에 파병을 해서 형님과의 의리를 지키기만 하면, 내 나라 군인의 목숨은 사지와 불안에 내맡겨도 좋은가. 그게 국가이미지를 좋게 하는가. 신종플루로 사람들이 불안과 공포에 하루하루를 보내도록 방치하는 것이 국가이미지 국익을 높이는 길일까. 도대체 인민 한 사람 한 사람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 휴업을 결정하는 것을 왜 내가 먼저 부끄러워해야 하고 남을 먼저 의식해야 하는가. 진정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가. 남이 그런 우리나라를 우습게 여길 것이라는 판단은 어떻게 해서 내린 것인가. 약자를 희생시키고, 생명을 존중하지 않으며, 그릇되고 왜곡된 남 의식에서 국가이미지와 국익이 제고된다는 어리석은 생각을 떨쳐내어야 한다. 


2009. 11. 4.

by 롱산 | 2009/11/04 10:31 | 잡문 | 트랙백 | 덧글(0)

입학사정관제, 전략적 접근으론 안 된다

 

입학사정관제, 전략적 접근으론 안 된다


흔히 학교를 군대에 비유한다. 수위실을 위병소로 교장을 사단장으로 보는 시각으로 학교를 들여다보면 조직, 운영, 관리, 통제 방식이 거의 같기 때문일 것이다. 일제 때 만들어진 근대학교는 전시체제에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전체주의를 생활화하고 내면화하는 가장 필요하고 효률적인 단체였다. 그 뒤 산업화 시대, 군사독재 시대를 거치는 과정에 학교의 군대적 속성은 더 강화되고, 마치 학교는 원래 그런 것, 그래야 학교라며 사람들에게 학교에 대한 그림과 인식을 그렇게 정형화 시키고 말았다.


군대란 곳은 싸움을 준비하는 곳이다. 전략 전술은 어떻게 싸울 것인가를 짜는 것이다. 그런데 학교는 그런 면에서도 군대와 같다. 학교는 공부하는 곳이 아니다. 경쟁을 준비하는 곳이다. 경쟁이 뭔가? 싸움이다. 같은 학생이 서로 적이 되어 싸워야 한다. 그리고 싸움에서 이기려고 학교는 학교대로 학생은 학생대로 전략전술을 짠다. 교사 학부모 학원들이 흔히 하는 말에 ‘입시전략을 …’ 어쩌고저쩌고 하는 말이 있다. 교육관련자들은 알게 모르게 이미 교육문제를 전투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입시제도나 방식이 바뀌거나 새로 만들어지면 교육관련자들은 저마다 전략을 마련하느라 긴장하고 불안해하고 부산해진다. 요즘 학교를 떠들썩하게 만드는 것은 입학사정관제다. 이미 매체를 통해 보도도 되었고, 입시학원이나 시청 같은 데서 발 빠르게 설명회 같은 것을 하고 난 한 발 늦은 시점에 교육청에서 교사를 모아 연수회를 열었다. 연수에 다녀 온 교사는 자기 학교로 돌아 와 교사들을 불러 모아 놓고 설명회 차원의 연수를 한다. 입학사정관제가 무엇인지 알고, 어떻게 대비할 것인가를 공식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전략에 돌입하는 것이다. 입학사정관제라는 고지에 얼마나 많은 병사를 어떻게 올릴 것인지를 서로 고민하자는 것이다. 학교와 교육을 지배하는 구조(메커니즘)는 교육학이 아니라 군사학이다. 


입학사정관제는 해당대학에 들어가기를 바라는 사람이 그 대학에서 수학할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를 알아보는 사람을 두어 대학에 들어오게 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하는 제도다. 사정관 한 사람이 사정해야 할 대상이 5백 명 이상은 될 정도로 사정관이 확보되어 있지도 않은 것은 물론, 사정관의 자질 또한 검증되지 않은 현실에서 이 제도가 일으키는 바람은 거세다. 특목고나 나머지 아이들(일반고 이하) 가운데 점수 좋고 집안 좋은 아이들을 무시험으로 뽑아내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라는 걱정도 앞서기도 한다.


입학사정관제 핵심은 서류전형과 심층면접/토론이다. 학생부, 자기소개서, 추천서, 수능성적, 수학계획서 등이 갖추어야 할 주요 서류다. 학교에서는 어떤 전략을 세우게 될까. 우선 될성부른 아이들을 한 눈에 보이게 모을 것이고, 그 아이들이 가고자 하는 대학에서 구체적으로 말하는 입학사정관제 전형 요강을 분석할 것이다. 교과/비교과 학생부 기록을 어떻게 해야 할지 미리 념두에 두어야 할 것이고, 자기소개서, 추천서, 수학계획서 등 진술형 서류를 어떻게 작성하는 게 리로울 것인지도 생각해 볼 것이다. 그렇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될까. 돌고 돌아 그 자리가 될 가능성이 크다. 기계적 준비와 대응으로 맞춤형 기성품만 량산될 것이다.


교육을 교육론리도 풀지 못하고 군사 전략으로 풀려고 하니 입학사정관제도 끝내 실패하고야 말 것이다. 문제가 무엇인가. 공부하려는(대학 가려는) 사람은 많고 받아 줄 사람 수는 정해져 있다는 것 아닌가. 입학사정관제도 이런 문제를 풀려는 한 방법일 것이다. 그렇다면 해법은 무엇인가. 일단 다 갈 수 있도록 받아주는 것은 어떨까. 다 받아 주었다가 해당 대학의 수학능력이나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아이들은 진급을 제한해버리면 안 되나. 그렇게 되면 두 쪽 바람 모두가 받아들여지고 해결되는 것 아닌가. 이렇게 해결하면 될 것을 입학사정관제다 뭐다 해서 끝내 해결할 수 없는 제도들이 마구 튀어나온다. 그런데 또 이런 제도들을 정복의 대상으로 보는 학원과 학교에서는 공학적 접근으로 거기에 맞는 군사학적 전략을 짜고 이를 진학연구라고 하고 앉아 있다. 되지도 않는 제도 제시에 되지도 않는 해결방안으로 다시 쳇바퀴 안에 갇히고 마는 것이다.


다른 나라 명문 대학의 성공한 입학사정관제 사례(이런 대학에서는 ‘관찰’ 비중이 크다)가 보여주는 교훈은 입학을 위해 인위적이고 억지적이고 형식적인 모든 ‘허튼 수작’을 그만두라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나라에서는 본질적이지 못한 이런저런 대책이 꼬리를 물고 쏟아져 나오고, 학원이나 학교, 학부모들은 이를 ‘허튼 수작’으로 뚫으려 한다. 특히 학교의 군대적 속성은 이런 문제를 전략적으로 인식하고 대비하게 한다. 학교가 교육적 모색을 하지 않는 한 군대와 다를 바 없다는 오명을 벗기는 어려울 것이다.


2009. 11. 3.






by 롱산 | 2009/11/03 11:37 | 잡문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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